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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Subprime Mortgage Crisis)로 미국 네바다주 엠파이어 도시 전체가 통째로 사라졌습니다. 우편번호까지 폐지된 도시의 이야기, 처음 이 사실을 접했을 때 저는 이게 영화적 과장인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는 걸 알고 나서야 노매드랜드가 왜 이렇게 무겁게 남는지 이해했습니다.

금융위기가 한 도시를 지운 방식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란 저신용자에게 무분별하게 주택 담보 대출을 내준 금융 기관들이 연쇄 부실로 무너지면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갚을 능력도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사라고 돈을 빌려준 뒤 그 빚 묶음을 금융 상품으로 팔아먹다가 집값이 꺼지는 순간 전부 터져버린 겁니다.
빅쇼트 같은 영화들은 이 위기를 예측하고 공매도로 돈을 번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정작 그 이후를 버텨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는 거였습니다. 위기를 분석하는 시선은 많아도, 그 잔해 위에서 살아가야 했던 얼굴들에 카메라를 들이민 작품은 드물었습니다.
노매드랜드의 배경이 되는 엠파이어는 기업 의존형 도시(Company Town)의 전형입니다. 여기서 기업 의존형 도시란 단일 기업이 고용·주거·상업 인프라를 모두 떠받치는 구조로, 기업이 문을 닫으면 도시 자체가 소멸합니다.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네바다주 유에스 짚섬 석고 공장이 가동을 멈추자 엠파이어는 그대로 지도에서 지워졌습니다. 주인공 펀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그 도시에 살았을 뿐입니다.
제가 이 설정을 보면서 자꾸 IMF 외환위기 때의 한국을 떠올렸습니다. 하루아침에 대기업이 무너지고 가장이 직장을 잃으면서 가정이 연쇄적으로 흔들리던 그 시절. 경제적 충격은 언제나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먼저 쓸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쓸림은 딱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펀의 경우처럼 실직 후 남편의 암 발병, 대출 상환 불가, 집 처분이라는 식으로 나쁜 일은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 2008년 금융위기로 미국 실업률은 10%까지 치솟았습니다 (출처: 미국 노동통계국(BLS)).
- 엠파이어 석고 공장 폐쇄 후 해당 우편번호(89405)는 실제로 폐지됐습니다.
- 영화의 원작은 작가 제시카 브루더가 3년간 현장 취재한 논픽션으로, 사탕무 수확·아마존 물류창고·국립공원 캠핑장 관리 등의 임시 노동을 직접 경험하며 쓴 보고서입니다.
새로운 유목민이 사는 방식
노마드(Nomad), 즉 유목민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유로운 방랑자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영화가 보여주는 유목민의 삶은 낭만과는 거리가 멉니다. 공용 화장실에서 세면하고, 밴 안에서 용변을 해결하고, 스페어 타이어 교체법을 처음부터 배우는 일상입니다. 제가 보면서 가장 불편했던 장면이 바로 이 부분들이었는데, 그 불편함 자체가 이 영화가 정직하다는 증거라고 느꼈습니다.
프리캐리어트(Precaria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프리캐리어트란 불안정(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합친 말로, 고용 불안과 사회적 보호망의 부재 속에서 살아가는 신빈곤층을 뜻합니다. 영화 속 노마드들이 바로 이 프리캐리어트의 실제 모습입니다. 아마존 물류창고의 피크 시즌 단기 계약직, 사탕무 수확 시즌 임시 농업 노동, 국립공원 캠핑장 관리직. 이들은 계절을 따라 일자리를 찾아 이동합니다.
흥미로운 건 이들이 불평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이젠하워 시대의 제조업 호황을 몸으로 기억하는 세대, 성실하게 일하면 결과가 따라온다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대로 이토록 열심히 살아도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참담하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이 장면들을 보면서 어린 시절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을 목도했던 기억이 자꾸 올라왔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막을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영화 안에는 따뜻함이 있습니다. 노마드들은 서로 정보를 나누고 공구를 빌려주고 음식을 함께 먹습니다. 아들을 잃은 사람, 시한부를 선고받고 마지막 여정을 떠난 노령의 여성, 체제에 등을 돌린 히피들.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도 서로를 껴안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어쩌면 우리가 정착해서 살면서 잃어버린 것들이 이 길 위에는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클로이 자오의 시선이 특별한 이유
클로이 자오 감독은 베이징 출신으로, 십 대 이후 미국에서 활동하며 자국에 비판적인 발언을 해왔습니다. 노매드랜드가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던 시기, 중국은 이 영화의 개봉을 취소하고 검색 엔진에서 감독의 이름을 지웠습니다. 자국 영화인이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에서 여러 부문 수상 유력자로 거론되는데도 시상식 중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예술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태도는 제가 보기에는 어떤 논리로도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오토에스노그라피(Autoethnography)적 연출 방식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감독 자신의 외부인 시선을 활용해 특정 공동체의 내부를 관찰하는 방식으로, 클로이 자오의 연출은 이 방법론에 가깝습니다. 중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미국의 주변부를 카메라에 담는 감독의 위치가 오히려 더 날카로운 관찰을 가능하게 했을 겁니다. 완전한 내부인도, 완전한 외부인도 아닌 시선이 이 영화의 담담함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솔직히 예상 밖이었던 건 자본주의 비판을 이렇게 조용하게 해낸다는 점이었습니다. 영화는 분노하지 않습니다. 금융위기에 집을 더 샀어야 했다고 말하는 이웃의 대사 하나로 탐욕의 민낯을 드러내고, 거대 물류기업 아마존의 창고에서 노인들이 무릎을 꿇고 일하는 장면으로 구조의 문제를 말합니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연출이 절제될수록 현실은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는 걸 이 영화를 보며 다시 확인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시아계 감독과 작품이 주목받는 흐름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이후 이어지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 배경에 정치적 고려가 섞여 있다는 시각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노매드랜드는 그런 맥락과 별개로 작품 자체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본 2020~2021년 작품들 중에서 이 영화만큼 오래 마음에 남은 건 없었습니다 (출처: 로튼 토마토, 비평가 점수 93%).
자주 묻는 질문
Q. 노매드랜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가요?
A. 네, 작가 제시카 브루더가 3년간 직접 임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취재한 동명의 논픽션이 원작입니다. 주인공 펀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그를 둘러싼 많은 노마드들은 실제 유랑 생활자들이 본인으로 출연했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이 있는 겁니다.
Q. 노매드랜드가 지루하다는 평도 있던데, 어떤 분들한테 맞는 영화인가요?
A. 사건 중심의 빠른 전개를 선호하신다면 실제로 다소 느리게 느껴질 수 있는 영화입니다. 반면 인물의 표정과 일상, 광활한 자연 풍경을 따라가며 생각을 가라앉히는 걸 좋아하신다면 굉장히 긴 여운을 남깁니다. 저는 후자에 가까워서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자꾸 화면에 눈이 갔습니다.
Q. 클로이 자오 감독이 중국에서 왜 논란이 됐나요?
A. 클로이 자오가 과거 인터뷰에서 중국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한 사실이 노매드랜드의 아카데미 수상 이슈와 맞물리면서 중국 내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결과적으로 노매드랜드의 중국 내 개봉이 취소됐고, 검색 차단 의혹도 제기됐습니다. 자국 감독의 수상 소식을 공식 채널에서 사실상 지운 셈입니다.
Q. 프랜시스 맥도맨드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몇 번이나 받은 건가요?
A. 노매드랜드로 세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파고(1996년)와 쓰리 빌보드(2017년)에 이은 세 번째 수상으로, 역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최다 수상 기록을 세운 배우입니다. 노마드의 삶을 연기하기 위해 외모나 신체 노출을 전혀 가리지 않은 이번 연기는 그 중에서도 가장 날것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결론
노매드랜드는 금융위기의 피해자들을 불쌍하게 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유랑 생활을 자유의 상징으로 낭만화하지도 않습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거부하면서도 따뜻한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제가 이 작품에 9점을 주는 이유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안정, 그 안정이 사실은 얼마나 얇은 유리 위에 서 있는 건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노매드랜드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 불편함을 조금 더 오래 품어보시길 권합니다. 그게 이 영화가 건네는 진짜 메시지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