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를 보고 나서 무서웠다는 말 대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한 적 있으신가요? 저는 아리 에스터 감독의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다 보고 나서 딱 그 상태였습니다. 거실 불을 다시 켜고도 한동안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는데, 무서워서가 아니라 멍해서였습니다. 장르는 공포인데, 남은 감정은 공포가 아니라 무력감이었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이야기가 왜 더 무겁게 남는가
요즘 날이 워낙 더워서 밖에 나가기도 싫고, OTT 목록만 멍하니 훑다가 오래 미뤄뒀던 이 영화를 재생했습니다. 유전이나 미드소마를 꽤 인상 깊게 봤던 터라, 이번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이야기가 쌓이고 터지는 경험을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전작들과 결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전작들은 이른바 '해결의 플롯' 구조를 따릅니다. 여기서 해결의 플롯이란, 사건이 인과관계에 따라 순차적으로 전개되고 클라이맥스에서 모든 것이 하나의 결말로 귀결되는 서사 구조를 말합니다. 관객은 무언가가 끝났다는 감각을 얻고 극장을 나섭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정반대입니다. 사건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흐릿해지고 무화(無化)되며 끝납니다. 저는 이것을 '미해결의 플롯'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그 감각이 꽤 날카롭게 남았습니다.
미해결의 플롯이란 서사가 닫히지 않고 열린 채로 끝나는 구조로, 관객에게 감정적 해소 대신 지속적인 불안을 안깁니다. 영화 속 주인공 '보'가 겪는 수많은 기괴한 상황들이 실제인지 환상인지 끝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 것도 그 일환입니다. 처음에는 답답했는데, 돌이켜보면 그 답답함 자체가 이 영화의 가장 정직한 메시지였던 것 같습니다.
- 유전·미드소마: 사건이 선형적으로 쌓이고 결말에서 해결되는 '해결의 플롯'
- 보 이즈 어프레이드: 사건이 무화되며 끝나는 '미해결의 플롯', 감정적 해소 없이 무력감만 남음
- 두 구조의 차이가 관객이 체감하는 여운의 성질을 완전히 바꿔놓음
슈퍼마더의 통제와 보의 심리적 진실
영화가 난해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은데, 저도 처음 볼 때는 장면 하나하나를 액면 그대로 따라가다가 중반부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관점을 바꿔서, 이 영화가 실제 사건이 아니라 보의 왜곡된 심리적 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받아들이고 나니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습니다.
심리적 투사(psychological projection)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자신이 인정하기 싫은 감정이나 욕망을 외부 현실에 덧씌워 지각하는 심리 방어 기제를 말합니다. 보가 겪는 기괴한 사건들 상당수는 그가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핑계이거나, 죄책감을 외부로 투사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보는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결코 그 통제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영화 속 어머니 '모나'는 아들의 모든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슈퍼마더로 그려집니다. 슈퍼마더란 자녀의 삶 전방위에 개입하며 감정적 죄책감을 도구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어머니상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보가 느끼는 죄의식 자체가 사실상 모나가 오랜 시간 주입한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정이 단순한 공포 장치가 아니라, 특정한 가족 역학 안에서 자라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공명할 수 있는 심리적 현실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가 은밀하게 '고아 의식'을 품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어머니를 잃음으로써 해방되고 싶다는 욕망과, 그 욕망 자체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것이 보의 진짜 내면 상태입니다. 아리 에스터 감독은 이전 작품들에서도 공통적으로 '어머니의 상실'에 대한 양가감정, 즉 상실의 슬픔과 은밀한 해방감이 뒤섞인 감정을 탐구해 왔는데(출처: IMDB - Hereditary), 이 작품에서 그 탐구가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구현됐다고 봅니다.
물의 이미지와 끊어낼 수 없는 운명론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해석을 찾아봤을 때, 물의 이미지에 관한 분석을 보고 제가 놓쳤던 장면들이 새롭게 읽혔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순히 배경으로 지나쳤던 분수대 장면, 보트 장난감, 결말부의 물 위 재판 장면이 하나의 상징 체계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물의 이미지는 양수(羊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수란 태아를 감싸고 있는 액체로, 이 영화에서는 보가 끊임없이 어머니의 자궁으로 퇴행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쉽게 말해, 보는 이 세계에서 싸우거나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무화되기를 원하는 인물입니다.
결말부의 재판 장면은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장면입니다. 처음엔 난데없다고 느꼈는데, 그 장면이 보가 자신의 삶 전체를 부정당하고 다시 어머니의 태내로 돌아가 절멸하는 과정을 은유한다고 읽고 나니 오히려 이 영화에서 가장 논리적인 장면처럼 보였습니다. 운명론적 복선을 연구하는 영화학자들도 이 감독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탈출 불가능한 숙명' 모티프를 주목하는데(출처: Roger Ebert - Beau Is Afraid 리뷰), 분수대 보트나 물의 이미지 같은 복선들은 주인공의 운명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음을 시각적으로 못 박아 두는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요소를 종합하면, 이 영화는 '공포영화의 탈을 쓴 가족 영화'라는 표현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뒤틀린 부모 자식 관계와 거기서 파생되는 도저한 운명론을 장르적 의례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공포가 목적이 아니라, 공포라는 언어가 이 관계를 설명하는 데 가장 적합한 형식이었던 것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보 이즈 어프레이드, 결말이 무슨 의미인가요?
A. 결말의 재판 장면은 보가 자신의 삶 전체를 부정당하고, 어머니의 존재로 다시 흡수되어 절멸하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탈출 불가능한 운명론'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 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단순한 꿈이나 환각으로 읽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영화 전체의 색이 달라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Q. 유전, 미드소마 보고 이 영화도 볼 만한가요?
A. 전작들과 결이 상당히 다릅니다. 유전이나 미드소마는 사건이 차곡차곡 쌓이며 결말에서 해소되는 구조인 반면, 이 영화는 끝까지 해소되지 않는 미해결의 플롯을 택하기 때문에 불쾌한 무력감이 훨씬 강하게 남습니다. 전작들이 좋았다고 해서 이 영화도 같은 방식으로 즐길 수 있다고 단정하긴 어렵고, 심리 서사 자체에 관심 있는 분들께 더 맞을 수 있습니다.
Q. 영화 속 물 이미지가 계속 나오는 이유가 뭔가요?
A. 영화 전반의 물 이미지는 양수, 즉 태내(胎內) 환경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보가 이 세상에서 버티거나 싸우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로 퇴행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반복적인 물의 이미지로 구현된다는 시각입니다. 분수대 장난감 보트 같은 소품들도 그 연장선에서 보의 운명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읽힙니다.
Q. 이 영화, 공포 영화 맞나요? 너무 어려운 것 같아서요.
A. 장르 분류상 공포·스릴러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보고 나면 '공포영화의 탈을 쓴 가족 영화'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시각적 공포보다는 심리적 억압과 뒤틀린 모자 관계를 파고드는 영화라, 공포물을 기대하고 보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결론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장르의 문법을 비틀어 심리적 억압과 운명론을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붙잡혀 있었던 건 기괴한 장면들이 아니라, 다 보고 난 뒤에도 한동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던 그 감각이었습니다. 공포영화치고는 이상한 여운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이 영화의 목적이었을 겁니다.
미해결의 플롯, 슈퍼마더, 운명론적 복선이라는 세 축을 염두에 두고 보면 처음보다 훨씬 많은 것이 보입니다. 집에서 혼자 깊이 생각하며 볼 영화를 찾고 있다면, 그 불쾌한 여운을 한 번쯤 직접 경험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tU8SleuKFRw&list=PLUpgTv3bu9rHWFdteoNvZs5T5LSrG6j6j&index=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