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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본즈 앤 올> (정체성, 소유욕, 완전한 합일)

by 몰괜자 2026. 8. 24.

식인이라는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영화가 있습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본즈 앤 올>(2022)이 바로 그 작품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파격적인 소재의 호러물이겠거니 했는데, 지난 주말 OTT로 다시 틀었다가 결말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식인이라는 금기를 다루면서도 끝내 사랑 이야기로 귀결되는 이 영화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질문을 던진다는 걸 그때 다시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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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본즈 앤 올>

정체성의 길항 작용 — 괴물과 고독 사이에서

이 영화를 단순한 공포물로 오해하다가 놓치게 되는 핵심이 바로 주인공 매런의 내면 구조입니다. 매런은 '나는 괴물이다'라는 인식과 '나는 혼자다'라는 인식을 동시에 안고 삽니다. 여기서 길항 작용(拮抗 作用)이란 두 힘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당기며 균형을 무너뜨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내가 해칠 수도 있다'는 공포가 발목을 잡고, 멀어지려 하면 '이대로 혼자일 수는 없다'는 욕망이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제가 이 장면들을 다시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매런이 아버지의 편지를 들고 길을 떠나는 초반부였습니다. 그 발걸음은 목적지를 향한 게 아니라, 두 가지 공포 사이에서 도망치는 데 가깝게 보였습니다. 실제로 영화는 매런이 어머니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그 두 인식이 어떻게 한 인간을 끊임없이 길 위로 내모는지를 조용하고 집요하게 그립니다.

이 내면의 긴장이 영화 전반을 이끄는 서사적 동력이라는 점에서, 본즈 앤 올은 호러보다는 심리 드라마에 훨씬 가깝습니다. 아버지의 편지와 어머니의 편지로 영화가 열리고 닫히는 구조 역시, 서로가 서로를 해칠까 봐 두려워하는 양극단의 공포를 대칭으로 보여주는 장치로 읽혔습니다.

  • '나는 괴물이다' → 타인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회피 본능
  • '나는 혼자다' → 누군가에게 강렬히 의지하고 싶은 결핍의 욕망
  • 두 인식의 충돌 → 매런을 길 위로 내모는 서사의 핵심 동력
요약: 매런의 정체성은 괴물이라는 공포와 고독이라는 결핍이 서로 당기는 길항 작용 위에 서 있고, 이것이 영화 전체를 움직이는 힘이다.

 

설리가 보여주는 소유욕의 민낯

마크 라일런스가 연기한 설리는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하고, 동시에 가장 솔직한 인물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만 먹는다는 원칙을 지키며 나름의 질서를 구축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매런을 향한 감정이 거절당하자 그 원칙은 단번에 무너집니다. 솔직히 이 장면은 처음 볼 때도, 다시 볼 때도 소름 돋았습니다.

설리의 행동은 나르시시즘적 소유욕(narcissistic possession)의 극단적 표현으로 읽힙니다. 나르시시즘적 소유욕이란 상대를 독립된 존재로 보지 않고 자신의 연장선이나 소유물로 인식하는 심리를 말합니다. 사랑이 수용되지 않자 상대를 말 그대로 자기 안으로 취하려는 충동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영화는 이 뒤틀린 감정을 폭력으로 분출시키는 과정을 매우 차갑고 담담하게 담아냅니다.

개인적으로는 설리가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매런의 미래 가능성 중 하나처럼 느껴졌습니다. 방향을 잃고 자신의 정체성을 잘못 소화하면 도달할 수 있는 종착점이요. 그래서 매런이 설리를 거부하는 장면이 단순한 도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는 선택으로 보였습니다. 출처: Metacritic — Bones and All 리뷰 종합에서도 설리 캐릭터에 대한 평단의 집중적인 분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약: 설리는 사랑의 거절을 폭력으로 전환하는 인물로, 나르시시즘적 소유욕이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다.

 

완전한 합일 — 몸이 유일한 안식처가 되는 결말

영화의 결말은 처음 봤을 때 감정적으로 정리가 안 됐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먹는다는 행위가 비극인지, 아름다움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고 나서야 그 장면의 무게가 제대로 느껴졌습니다.

두 사람이 "어디로 갈까"라는 물음에 "아무 데나"라고 답하는 대화가 있습니다. 이 교환은 단순한 대사가 아니라, 이 영화가 말하는 안식처의 정의 자체입니다. 물리적 공간이 아닌 서로의 몸이 목적지였기 때문에, 어디든 상관없었던 것입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개념이 여기서 낯선 방식으로 실현됩니다. 카타르시스란 감정의 정화, 즉 억눌린 감정이 극적인 순간에 한꺼번에 해소되는 경험을 뜻합니다. 매런이 리를 먹는 장면은 슬픔과 사랑과 해방이 동시에 터지는, 이 영화만의 카타르시스입니다.

저는 이 결말이 기존 로맨스 영화에서 보기 힘든 미학적 완결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합일(合一), 즉 두 존재가 하나가 되는 개념을 이 영화는 은유가 아닌 물리적 현실로 밀어붙입니다. 리는 자신의 몸을 내어줌으로써 매런 안에 영원히 거하게 되고, 그 저주받은 식인의 본능은 가장 숭고한 사랑의 형식으로 뒤집힙니다. 출처: Rotten Tomatoes — Bones and All에서 평론가들도 이 결말의 해석을 두고 엇갈린 의견을 보이는데, 그 논쟁 자체가 이 영화의 힘을 방증한다고 봅니다.

요약: 매런이 리를 먹는 결말은 비극이 아니라 완전한 합일의 완성이며, 이 영화에서 몸은 두 사람이 찾아 헤맨 유일한 안식처다.

 

자주 묻는 질문

Q. 본즈 앤 올, 공포 영화 못 보는 사람도 볼 수 있나요?

A. 제 경험상 전형적인 공포 영화와는 결이 많이 다릅니다. 점프 스케어나 자극적인 고어 장면보다는 잔잔하고 느린 서사가 대부분이고, 식인 장면도 충격 자체보다는 감정적 맥락 안에서 배치됩니다. 다만 식인 행위 자체에 강한 거부감이 있다면 초반 오프닝 장면은 꽤 당혹스러울 수 있으니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Q. 설리가 갑자기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가 뭔가요?

A. 설리는 매런에게 거절당한 뒤 자신이 고수하던 원칙을 스스로 깨버립니다. 이는 상대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갖지 못했을 때 그 대상을 파괴하거나 통제하려는 소유욕의 폭발로 읽히는 장면입니다. 사랑처럼 보이지만 실은 집착이었다는 것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순간이라고 저는 해석했습니다.

 

Q. 결말에서 매런이 리를 먹는 게 해피엔딩인가요, 새드엔딩인가요?

A. 이 질문이 가장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저는 둘 다라고 생각합니다. 리는 죽지만 매런의 몸 안에 영원히 남게 되고, 매런은 처음으로 자신의 본능을 사랑의 맥락에서 완성합니다. 비극의 형식을 빌린 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Q. 영화 속 식인은 어떤 상징인가요?

A. 영화는 식인을 단순한 괴물성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타인과 완전히 하나가 되고 싶은 욕망, 혹은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 정체성을 가진 자들의 고독을 상징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때 식인 장면보다 두 사람이 서로의 냄새를 맡는 장면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는데, 그게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결론

본즈 앤 올은 식인이라는 소재를 스릴러로 소비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정체성의 길항 작용, 소유욕의 위험성, 그리고 타인과의 완전한 합일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입니다. 저는 이 세 가지가 하나의 서사 안에서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방식이, 이 영화를 단순한 파격 이상으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느린 호흡과 관념적인 전개가 취향에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솔직히 인정합니다. 후반부는 특히 서정성이 지나쳐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극장이 아닌 집에서 조용히, 가능하면 혼자 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한동안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그 묵직한 여운이 이 작품의 진짜 완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Tz1_JHtz3_I&list=PLUpgTv3bu9rHWFdteoNvZs5T5LSrG6j6j&index=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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