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OTT 플랫폼을 뒤적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우연과 상상>을 틀었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이 감독의 연출에 완전히 매료된 터라, 기대를 한껏 품고 시작했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잔잔할 거라 생각했던 영화가 의외로 유머러스했고, 대화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렇게까지 밀도 높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웠습니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작품이 왜 그 상을 받았는지,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옴니버스 형식이 만들어내는 묘한 통일감
제가 직접 봤는데, <우연과 상상>은 세 편의 단편이 하나의 장편처럼 묶인 옴니버스(Omnibus)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옴니버스란 서로 독립적인 이야기들을 하나의 주제 아래 묶어 구성하는 영화 형식으로, 각 단편이 별개의 사건과 인물을 다루면서도 전체적인 테마는 공유합니다. 세 이야기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지만, '세계가 인간에게 불쑥 개입하는 우연'과 '그 우연에 인간이 상상으로 대응하는 방식'이라는 메커니즘은 일관되게 관통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마구치 감독이 이 '우연과 상상'이라는 테마로 원래 7편의 단편을 구상했고, 그 중 3편을 먼저 묶어 개봉했다는 점입니다. 나머지 4편 역시 장편 옴니버스 형식으로 추가 공개될 예정이라고 알려져 있어, 결국 총 세 편의 장편 옴니버스 시리즈로 완성될 것으로 보입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나는 짧은 단편을 만들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최소 30~40분 분량의 서사가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된다고 느끼는 듯했습니다.
제가 세 편을 연달아 보면서 느낀 건, 이 영화가 생각보다 훨씬 유머러스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아트하우스 영화 특유의 무겁고 느린 호흡을 예상했는데, 1부에서 택시 안 대화 장면이 시작되자마자 입꼬리가 올라갔습니다. 동시에 그 유머 뒤편에 감도는 인물들의 감정이 예리하게 느껴졌고요. 정보의 비대칭성(Information Asymmetry), 즉 화자는 모르지만 청자(그리고 관객)는 알고 있는 맥락의 차이가 이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 1부: 택시 안 대화에서 시작되는 삼각관계와 선택의 윤리
- 2부: 복수를 꿈꾸던 남자가 맞닥뜨리는 예상치 못한 역전
- 3부: 낯선 두 여자가 역할 놀이를 통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
세 편 모두 '우연한 조우'에서 시작해 '상상의 대응'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반복되는데, 이 패턴이 반복될수록 영화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철학적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집니다. 영어 원제가 "Wheel of Fortune and Fantasy"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연(Fortune)과 상상(Fantasy)이 수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는 의미죠.
역할 놀이가 대화를 예술로 만드는 순간
제가 세 편 중 가장 오래 여운이 남았던 건 3부 "다시 한 번"이었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된 만남처럼 보였는데, 두 여자가 서로의 상처를 알아가면서 자청해서 역할 놀이(Role Play)를 시작하는 순간 영화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역할 놀이란 특정 인물이나 상황을 가정하고 연기하는 행위로, 이 영화에서는 서로가 간직한 타인의 역할을 대신 맡아줌으로써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안전하게 꺼내는 장치로 활용됩니다.
나츠코는 오래 사랑했지만 끝내 고백하지 못한 미카를 아야가 연기해 주는 덕분에, 비로소 "나는 너만을 사랑했어"라는 말을 내뱉습니다. 아야는 자신이 동경했던 노조미를 나츠코가 연기해 주는 덕분에, "너는 원래 특별한 아이였어"라는 말을 듣고 오랜 정체성의 공백을 채웁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진 건, 연기가 연기임을 두 사람 모두 알면서도 그 말들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역설 때문이었습니다.
하마구치 감독의 연출 방식에서 결정적인 특징은 우연을 '초대'한다는 데 있습니다. 감독은 하루 만에 찍을 수 있는 장면도 여러 날에 걸쳐 반복 촬영하는데, 이는 배우들 사이에서 통제할 수 없는 화학적 변화, 즉 계획되지 않은 감정의 순간이 포착될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이 촬영 방식 자체가 영화의 주제인 '우연을 기다리는 태도'와 정확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출처: 베를린 국제영화제 공식 사이트에서도 이 작품의 심사위원 대상 수상 소감에서 감독의 이러한 작업 방식이 언급된 바 있습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건 카메라의 위치였습니다. 역할 놀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 카메라가 처음으로 실내에서 바깥으로 빠져나가 유리창 너머로 두 인물을 비춥니다. 그 전까지 대화에 깊이 몰입했던 저를 갑자기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자리로 돌려놓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쇼트 하나로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건 연기입니다"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그 연기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를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연출이었습니다.
대화 중심 서사가 주는 치유의 감각
<우연과 상상>을 보면서 제가 계속 떠올린 단어는 '치유'였습니다. 세 편 모두 인물들이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자신도 몰랐던 감정을 발견하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하마구치 감독의 영화에는 유독 대화 장면이 많은데, 그 대화들은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니라 화자(話者)와 청자(聽者)가 서로 다른 맥락으로 같은 말을 주고받으면서 이야기가 새로운 층위로 전개됩니다. 화자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하고, 청자는 자신의 맥락 위에 그 말을 얹어 상상하며 듣는 구조입니다.
이 정보의 비대칭성은 관객에게 독특한 몰입감을 줍니다. 저는 청자 캐릭터가 화자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지켜보면서, 마치 두 겹의 이야기를 동시에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방식이 일부 관객에게는 다소 건조하거나 문학적 실험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점도 이해합니다. 실제로 극적인 긴장감보다는 대화의 맥락을 읽어내는 섬세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영화입니다.
그럼에도 제 경험상 이 영화가 남기는 치유의 감각은 꽤 실제적입니다. 특히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1부의 메이코가 상상 속에서 옛 연인을 향한 감정을 모두 소진하고 '옳은 선택'을 내리는 장면, 2부의 사사키가 터널로 들어가는 버스 안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는 채로 장면이 끊기는 결말, 그리고 3부의 두 여자가 웃으며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까지. 세 편 모두 정답을 주지 않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지는 영화입니다.
영화학자들 사이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현재성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출처: The Criterion Collection에서도 그의 작품들을 다루며, 대화가 단순한 서사 도구를 넘어 영화의 주요 미장센(Mise-en-scène)으로 기능한다고 분석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를 가리키는 영화 용어인데, 하마구치 영화에서는 그 자리를 배우들의 대화와 신체 언어가 채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우연과 상상, 드라이브 마이 카랑 비교하면 어떤가요?
A. 제가 직접 두 작품을 봤는데, <드라이브 마이 카>가 3시간짜리 묵직한 단일 서사라면, <우연과 상상>은 40분 내외의 단편 세 편이 이어지는 구성입니다. 밀도는 <드라이브 마이 카>가 높지만, 하마구치 감독의 대화 연출 방식을 처음 경험하기엔 <우연과 상상>이 더 가볍게 진입하기 좋습니다. 유머 감각도 훨씬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Q. 세 편 중 어떤 에피소드가 제일 좋았나요?
A. 저는 3부 "다시 한 번"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두 낯선 여자가 역할 놀이를 통해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구조가 가장 정교하게 짜여 있었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1부와 2부도 각각 다른 방식의 긴장감이 있어, 세 편을 모두 보고 나서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Q. 대화가 많은 영화인데 지루하지 않나요?
A. 솔직히 말하면, 영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막을 꼼꼼히 읽으며 대화의 맥락을 따라가야 하는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화자가 모르는 정보를 청자(그리고 관객)가 알고 있는 구조 덕분에, 대화 한 마디 한 마디에서 긴장과 유머가 동시에 발생해 오히려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Q.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제가 시청했을 당시 국내 주요 OTT 플랫폼에서 스트리밍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플랫폼마다 서비스 여부가 바뀔 수 있으니, 검색창에 제목을 입력해 현재 제공 중인 곳을 확인해보시길 권합니다. 주말 오후 혼자 혹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감상하기에 딱 맞는 영화입니다.
결론
<우연과 상상>은 제가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오래 생각이 이어진 작품입니다. 화려한 사건도, 극적인 반전도 없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감정의 파동을 이렇게까지 정밀하게 포착한 영화는 드물다고 느꼈습니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세 편을 이어 보면서 '우연'과 '상상'이 수레바퀴처럼 맞물리는 패턴이 반복될수록, 하마구치 감독이 이 테마에 얼마나 집요하게 천착하는 감독인지 실감했습니다.
아트하우스 영화 특유의 정적인 연출이 취향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은 솔직히 인정합니다. 하지만 일상의 대화 속에서 인간 관계의 깊이와 치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다면, 주말 오후 한두 시간을 이 영화에 내어줄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인상 깊게 봤다면 더더욱 권하고 싶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50K9m9QuaK4&list=PLUpgTv3bu9rHWFdteoNvZs5T5LSrG6j6j&index=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