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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리뷰 (퀴어 영화, 미장센, 셀린 시아마)

스토리 아카이브 2026. 10. 31. 14:00

목차


    퀴어 영화라는 말만 듣고 넷플릭스를 켰는데, 두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한동안 화면을 끄지 못했습니다. 제가 봐온 수많은 로맨스 영화들이 이 작품 앞에서 조금 초라해 보였다고 하면 과장일까요.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 시작되는지를, 대사 한 줄 없이도 보여줄 수 있다는 걸 제 경험상 처음으로 납득하게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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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퀴어 영화라서 특별한 게 아니었습니다 — 미장센이 감정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퀴어 영화는 성 정체성 자체를 드라마의 중심 갈등으로 삼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이 작품을 보고 나서 느낀 건 달랐습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두 여성이 동성이라는 사실을 '사건'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냥 사랑이 생겨나는 과정을 보여줄 뿐입니다.

    이 작품의 핵심은 미장센(mise-en-scène)에 있습니다. 미장센이란 카메라가 찍기 전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 요소, 즉 인물의 위치, 조명, 소품, 배경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연출 방식입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이 미장센을 통해 인물의 감정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도 관객이 스스로 읽어내도록 유도합니다. 조명 하나, 시선의 방향 하나가 대사 열 줄보다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배경은 18세기 프랑스의 외딴 섬입니다. 화가 마리안느는 밀라노로 정략결혼을 앞둔 귀족 딸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몰래 완성해야 하는 의뢰를 받습니다. 당시 여성 화가는 아버지 이름으로만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고, 엘로이즈는 초상화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결혼에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시대가 허락하지 않는 존재였던 셈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장면은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그리기 위해' 바라보고, 엘로이즈가 '그려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 바라보는 장면이었습니다. 서로의 시선이 교차하는 그 순간, 감정이 이미 시작되어 있었습니다. 대사가 없었는데도 제 쪽에서 먼저 숨을 참고 있었습니다.

    음악도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엔 이 선택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침묵이 쌓이다 보니 오히려 인물의 숨소리와 눈빛 하나하나가 더 크게 들렸습니다. 음악으로 감정을 설명해주지 않으니, 보는 사람 쪽에서 직접 감정을 채워 넣게 됩니다. 이건 제가 예상 밖이었습니다.

    • 미장센: 화면 안 모든 시각 요소로 감정을 전달하는 연출 방식
    • 자연광만 사용해 18세기 실내의 질감을 그대로 재현
    • 음악 대신 침묵과 파도 소리, 불 소리로 긴장감 조성
    • 두 인물의 시선 교환 자체가 감정의 시작이자 고백

    이 작품은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퀴어 종려상을 동시 수상했으며, 당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같은 경쟁 부문에 올랐습니다(출처: 칸 영화제 공식 사이트). 독립·예술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국내 누적 관객 수 16만 명을 달성했다는 수치는, 이 영화가 특정 관객층만을 위한 작품이 아니었다는 걸 방증합니다.

    요약: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퀴어라는 소재보다 미장센과 시선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이 핵심이며, 칸 각본상·퀴어 종려상 수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시선 — 이 섬세함은 어디서 왔을까

    일반적으로 퀴어 영화의 섬세한 표현력은 감독 본인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설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경험상 이 설명이 완전히 틀리진 않지만, 셀린 시아마 감독의 경우엔 그것보다 훨씬 구조적인 관심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전작 <톰보이>를 같이 찾아봤습니다. 거기서도 주인공은 자신의 성 정체성(gender identity)을 탐색하는 아이입니다. 성 정체성이란 자신이 어떤 성별에 속하는지에 대한 내면의 인식을 뜻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스스로를 남자아이로 인식하는 열 살 아이의 여름이 담겨 있습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보여준 그 섬세함이 <톰보이>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국내에 개봉되고 나서 셀린 시아마 감독의 전작들, <톰보이>와 <워터 릴리스>가 뒤따라 개봉된 건 우연이 아닙니다. 이 감독의 작품이 어떤 결로 이어지는지를 직접 확인해보면, 그 중심에는 항상 '사회가 규정한 틀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편 이 영화를 두고 서양 퀴어 영화와 아시아 퀴어 영화의 온도 차가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실제로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는 국내 개봉 당시 도입부 베드신이 삭제된 채 들어왔고, 관객 일부는 앞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채 봤습니다. 불과 몇 년 전 이야기입니다. 이후 무삭제판이 15세 관람가로 재개봉됐다는 사실은, 그 사이 인식이 꽤 달라졌다는 신호입니다.

    제가 느끼기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국내에서 16만 명이라는 관객을 모은 것도 그 흐름 위에 있습니다. 이 영화는 동성애 코드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두 인간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쪽을 선택했고, 그 선택이 더 넓은 관객에게 닿았습니다. 퀴어 영화를 장르로 소비하던 방식에서, 사랑 이야기 자체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걸 제 경험상 이 작품을 통해 실감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당시 셀린 시아마 감독에게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은 당신이 받았어야 했다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두 영화가 같은 해 경쟁한 칸에서 각본상을 가져간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를 생각하면, 그 말이 어떤 무게인지 짐작이 갑니다(출처: IMDb - Portrait of a Lady on Fire).

    요약: 셀린 시아마 감독은 전작 <톰보이>부터 일관되게 정체성 탐색을 다뤄왔으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퀴어 코드를 넘어 보편적 사랑 이야기로 국내 관객에게 닿은 작품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퀴어 영화 처음 보는데 괜찮을까요?

    A. 일반적으로 퀴어 영화가 낯설다고 느끼는 분들도 있는데, 제 경험상 이 작품은 오히려 진입 장벽이 낮습니다. 자극적인 장면이나 빠른 전개보다 시선과 침묵으로 감정을 쌓아가는 방식이라, 처음 접하는 관객도 두 사람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됩니다. 퀴어 영화보다 시대극 로맨스에 가깝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Q. 영화가 너무 느리다는 말이 있던데, 실제로 어떤가요?

    A. 느린 호흡은 맞습니다. 제가 직접 봐보니 초반 30분은 사건 없이 시선과 공간만 쌓입니다. 다만 이 느림이 의도된 연출, 즉 미장센의 일부라는 걸 알고 나면 느리다는 느낌보다 집중하게 되는 경험이 납니다. 빠른 서사에 익숙한 분이라면 처음엔 어색할 수 있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그 속도가 오히려 강점이 됩니다.

     

    Q. 칸 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이유가 뭔가요?

    A. 각본상(Screenplay Award)은 대사와 이야기 구성 자체의 완성도를 평가합니다. 이 영화는 대사가 많지 않음에도 각 장면이 감정의 변화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특히 두 인물이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고백의 언어로 설계한 구성이 각본상 수상 이유로 꼽힙니다.

     

    Q. 셀린 시아마 감독의 다른 작품도 비슷한 분위기인가요?

    A. 전작 <톰보이>나 <워터 릴리스>도 정체성과 감정을 절제된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다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시대극 특유의 영상미를 갖췄다면, <톰보이>는 훨씬 일상적이고 담백한 톤입니다. 제 경우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먼저 보고 <톰보이>를 찾아본 순서가 좋았습니다.

     

    결론

    퀴어 영화라서 봐야 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저는 이 작품을 보고 나서 한동안 사랑이 시작되는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를 정말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 시선에서 어떻게 감정이 생겨나는지를 이 영화만큼 잘 보여준 작품이 제 경험상 많지 않았습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다른 작품이 궁금하다면 <톰보이>부터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이 감독이 오랜 시간 어떤 이야기에 집중해왔는지 흐름이 보입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으며, 자막 없이 화면만 틀어도 분위기가 전달될 만큼 미장센 자체가 언어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ynTRS8BlSX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