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홍상수 감독 영화라면 늘 비슷하다는 인상이 강해서, 주말 오후에 아무 기대 없이 OTT를 켰는데 어느 순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4층짜리 빌딩 한 채가 이야기 전체를 품는 구조라니, 직접 겪어보니 이게 단순한 공간 설정이 아니더군요. 영화감독 병수(권해효 분)가 딸 정수, 건물주 혜옥(이혜영 분)과 함께 논현동 빌딩을 층층이 올라가는 장면에서, 저는 이미 이 영화가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빌딩이 곧 이야기다 — 시각화된 플롯 구조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을 조금이라도 본 분이라면 '차이와 반복'이라는 개념이 낯설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차이와 반복이란, 비슷해 보이는 상황이나 대화가 미묘하게 어긋나며 반복되면서 의미가 생겨나는 홍상수 특유의 서사 방식입니다. 제가 이전 작품들을 볼 때는 이 구조가 머릿속에서만 그려졌는데, [탑]에서는 그게 물리적인 건물로 눈앞에 펼쳐집니다. 4층이라는 공간이 그냥 배경이 아니라, 플롯 자체를 담는 그릇인 거죠.
영화의 구조는 액자식 서사(Framed Narrative)를 취합니다. 액자식 서사란 바깥 이야기가 안쪽 이야기를 감싸는 방식으로, 영화 속 영화나 이야기 속 이야기를 구성할 때 쓰이는 기법입니다. 혜옥이 부녀에게 1층부터 4층을 순서대로 보여주는 프롤로그가 거대한 바깥 액자가 되고, 병수가 자리를 비운 뒤 각 층에서 벌어지는 네 개의 이야기가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구조가 머리로 따라가기 전에 몸으로 먼저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층이 바뀔 때마다 계절이 달라지고, 인물 관계의 온도도 달라지니까요.
특히 3층과 4층의 관계는 제 경험상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3층에서는 병수와 선의(송선미 분)의 동거가, 4층에서는 병수와 지형(조윤희 분)의 관계가 그려지는데, 시간적으로는 병행하는 듯하면서도 서로 단절된 평행우주(Parallel Universe)처럼 작동합니다. 평행우주란 같은 시공간 위에 놓여 있지만 서로 교차하지 않는 또 다른 세계의 양상을 뜻하는데, 3층에서는 천장에서 물이 새고 4층에서는 화장실이 막히는 식으로, 유사하지만 미묘하게 어긋난 상황들이 병렬로 제시됩니다. 한쪽의 병수는 채식을 하고, 다른 쪽의 병수는 고기로 보양을 하죠.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지만, 영화는 그 모순 자체를 의미로 삼습니다. 이동진 평론가의 분석을 참고하면서 다시 떠올려보니, '오! 수정'에서 포크와 스푼의 차이가 중요했듯 여기서는 3층과 4층 사이의 어긋남 그 자체가 핵심이라는 해석이 딱 맞아 떨어졌습니다(출처: LiveWiki 이동진 평론가 해설 요약).
음악 연출도 이 구조를 뒷받침합니다. 초반에 병수가 직접 연주하는 기타 소리, 즉 디제시스(Diegesis) 사운드가 있습니다. 디제시스란 화면 안의 세계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소리를 뜻합니다. 그런데 병수가 자리를 비운 뒤에는 같은 기타 음악이 화면 밖에서 덧씌워지는 비디제시스(Non-Diegesis) 배경음으로 전환됩니다. 안의 이야기를 품은 바깥 이야기를 음악으로도 구현한 셈인데, 직접 들어보니 이 전환이 생각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영리했습니다.
- 지하 1층: 혜옥과 정수의 대화 — 바깥 액자가 닫히며 안으로 진입하는 관문
- 2층 레스토랑: 병수와 선의의 첫 만남 — 한 달 뒤, 관계의 씨앗
- 3층 살림집: 병수와 선의의 동거 — 다시 몇 달 뒤, 일상의 균열
- 4층: 병수와 지형의 관계 — 3층과 평행하면서도 단절된 또 다른 세계
"혼자 사는 사람"이 혼자 살 수 없는 이유 — 인식론과 감정의 결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오래 걸린 장면은, 딸이 아버지를 두고 "집 안에서 보이는 모습이 진짜"라고 말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혜옥은 "감독으로서의 외부 모습도 그의 진짜 모습일 수 있다"고 받아칩니다. 두 사람 모두 병수를 "가장 잘 안다"고 여기는데, 그 인식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장면이죠. 저는 그 순간 뭔가 뒷머리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그건 결국 우리가 목도한 층 하나만을 본 것 아닐까 싶었거든요.
이것이 영화가 끌어안고 있는 인식론(Epistemology)의 문제입니다. 인식론이란 인간이 세계와 타인,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알고 이해하는가를 다루는 철학적 탐구 영역입니다. [탑]은 이 질문을 건물 구조와 동일선상에 놓습니다. 어떤 한 층만으로 4층짜리 빌딩 전체를 설명할 수 없듯, 한 면만 보고 사람을 단정하는 것은 불완전한 인식이라는 거죠. 홍상수 감독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같은 전작에서도 이 문제를 건드렸다는 게 알려져 있는데, [탑]에서는 그것이 공간이라는 시각적 논리로 훨씬 선명하게 제시됩니다(출처: 유튜브 이동진 평론가 영화 해설).
그리고 병수 본인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는 스스로를 "혼자 해결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지만, 영화 전체를 보면 선의와 지형 모두 그를 지극한 마음으로 돌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병수가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불완전한 관찰자라는 점이었습니다. 자기 인식과 실제 삶의 방식 사이의 이 간극이, 이 영화에서 가장 쓸쓸하면서도 가장 솔직한 지점으로 느껴졌습니다.
감정선으로 넘어오면, 초반에 아버지에게 존댓말을 쓰며 거리를 두던 딸이 후반부에 반말로 다정하게 "아버지 건강은 어때요?"라고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짧은 변화에서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른 종류의 뭉클함이었습니다. 설명이 없어도,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풀린 것이 느껴졌거든요. 이동진 평론가가 '이 영화는 홍상수의 아네트가 아닐까'라고 표현한 것도, 창작자가 딸과의 관계를 작품 안에 녹여냈다는 자전성(Autobiographical Quality)의 관점에서 읽힌다는 뜻인데, 여기서 자전성이란 감독 자신의 실제 삶과 경험이 작품 세계에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특성을 말합니다. 저는 그 해석에 상당 부분 동의하는 편입니다. 구조와 미학이 아무리 정교해도, 이 영화가 끝까지 남기는 온기는 결국 그 부녀 관계에서 나오는 것 같았으니까요.
자주 묻는 질문
Q. 홍상수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도 [탑]을 바로 봐도 될까요?
A. 제가 직접 겪어보니 [탑]은 홍상수 입문작으로 오히려 적합할 수 있습니다. 4층짜리 빌딩이라는 명확한 공간 구조 덕분에 이야기의 흐름이 눈에 잡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전작과의 비교에서 오는 감동을 느끼고 싶다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생활의 발견' 정도를 먼저 보시면 훨씬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Q. 3층과 4층 이야기가 시간순인가요, 아닌가요?
A. 1층에서 3층까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어지지만, 4층은 3층과 시간적으로 병행하는 듯하면서도 논리적으로 단절된 평행우주적 구성에 가깝습니다. 두 층의 병수가 동시에 제주도 행을 고민하고 몸이 좋지 않은 상황임에도, 먹는 것도 주변 인물도 다릅니다. 영화는 이 모순을 설명하지 않고 그대로 제시합니다.
Q. [탑]은 OTT로도 볼 수 있나요?
A. 저는 극장 개봉 때 놓치고 OTT에 올라온 뒤 주말에 혼자 차 한 잔 마시며 봤는데, 오히려 그 상황이 영화 분위기와 잘 맞았습니다. 대형 스크린의 극장 경험이 분명 다르겠지만, 홍상수 영화 특유의 대화 중심 서사는 집에서 집중해서 보기에도 충분히 몰입이 됩니다. OTT 서비스 제공 여부는 플랫폼마다 다르니 현재 기준으로 확인이 필요합니다.
Q. 주인공 병수는 결국 어떤 사람으로 봐야 하나요?
A. 영화는 그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 것이 의도입니다. 딸의 시선, 혜옥의 시선, 선의와 지형의 시선이 모두 다르고, 병수 자신의 자기 규정도 실제 삶의 모습과 다릅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병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단정하고 싶다면, 그 느낌 자체가 영화의 덫에 빠진 것일 수 있습니다.
결론
홍상수 감독 영화가 다 비슷해 보인다는 말, 저도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탑]을 보고 나서는 그 생각이 한 층만 보고 건물 전체를 말하려 했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는 걸 느꼈습니다. 빌딩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이 인식론적 주제를 담는 구조물이 되고, 그 안에서 평행우주처럼 교차하는 인물들의 삶이 조용하게 쌓이는 방식은, 제가 본 홍상수 영화 중에서도 가장 명확하게 설계된 작품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복잡한 액자식 서사나 인식론 같은 개념이 낯설어도 괜찮습니다. 저는 그냥 딸과 아버지 사이에 반말이 돌아오는 그 짧은 순간만으로도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할 것 같습니다. 홍상수 전작 중 어디서 시작할지 막막하다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 수정', '생활의 발견' 세 편을 먼저 보고 [탑]으로 오시면 그 거리와 깊이가 한층 더 선명하게 느껴질 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D7b-Iw8E7fU&list=PLUpgTv3bu9rHWFdteoNvZs5T5LSrG6j6j&index=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