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 OTT 앱을 켜고 뭘 볼지 고민하다가 결국 찜 목록만 훑다 끄는 날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날이 꽤 많았는데, 그 찜 목록 맨 위에 오래 머물러 있던 작품이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였습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2021년 최고의 외국 영화로 꼽은 작품이라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요. 막상 틀고 나서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빠져들었고, 끝나고 나서도 한참 멍하니 있었습니다.

켈리 라이카트가 다시 쓴 서부극의 시공간
영화의 배경은 1820년대 오리건 주입니다. 미국이 지금의 영토를 아직 온전히 확보하지 못했던 시절, 컬럼비아 강 유역의 원시림이 배경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 시대로 바로 뛰어들지 않습니다. 먼저 현대의 강변에서 한 여성이 개와 함께 산책하다 나란히 묻힌 두 개의 해골을 발견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 구성을 처음 봤을 때는 '왜 굳이 이렇게 시작하지?' 싶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그 의도가 선명하게 이해됐습니다.
라이카트 감독은 네오 웨스턴(Neo-Western) 장르를 택했습니다. 네오 웨스턴이란 전통적인 서부극의 배경과 관습을 빌리되 그 안에 담긴 신화와 이념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는 장르를 말합니다. 총과 말, 개척자의 낭만으로 포장된 미국 서부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이면에 무엇이 있었는지 들여다보는 방식이죠. 감독은 가장 서부극다운 시공간 속에 가장 서부극답지 않은 두 인물을 배치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4:3 화면 비율도 처음엔 낯설었습니다. 와이드스크린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대에 정방형에 가까운 화면을 고집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비율은 인물과 인물 사이의 거리를 좁혀 보이게 하고, 수직으로 뻗은 나무와 지면을 한 화면에 자연스럽게 담아냅니다. 채집 장면에서 두 주인공이 숲 속에 있는 모습이 이 비율 덕분에 훨씬 밀도 있게 포착됩니다. 제가 보기엔 이 선택이 단순한 미학적 취향이 아니라, 인물 간 정서적 교감을 화면 구조 자체로 설계한 결과였습니다.
- 배경: 1820년대 오리건 주, 미국 영토 확장 이전의 서부
- 장르: 네오 웨스턴 — 서부극 문법을 빌려 미국 신화를 해체하는 방식
- 4:3 화면 비율 — 인물 밀착감과 자연 수직 구도를 동시에 확보
- 현대 도입부 — 해골 발견 장면이 전체 이야기의 프레임을 구성
총 대신 요리로 쓴 미국 개척사
쿠키(Cookie)와 킹루(King-Lu)의 만남은 세 번에 걸쳐 이뤄집니다. 첫 만남에서 쿠키가 위험에 처한 킹루를 숨겨주고, 두 번째 만남에서 킹루가 쿠키에게 거처를 내어줍니다. 주고받는 구조 위에 우정이 쌓이는 방식인데, 이 구성이 생각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작동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거창한 선언도 없는데 어느 순간 '이 둘은 진짜 친구구나' 하는 확신이 들더라는 겁니다.
이들이 벌이는 일은 단순합니다. 마을에 처음 들어온 소, 즉 '퍼스트 카우'에게서 몰래 우유를 짜내 오일 케이크를 만들어 파는 것입니다. 위험하고 불법적인 행위지만, 화면에서는 오히려 두 사람이 가장 생기 있고 따뜻하게 보이는 순간이 바로 이 요리 장면들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범죄에 가까운 행위가 이렇게 따뜻한 질감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게요.
라이카트 감독이 겨냥한 지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부극에서 미국 최초의 개척자는 총을 들고 땅을 정복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오리건에 최초로 도착한 백인이 쿠키였다면, 그는 총 대신 요리로 사람들에게 다가갔을 거라는 대안적 상상을 펼칩니다. 이른바 미니멀리즘(Minimalism) 서사 전략입니다. 미니멀리즘이란 극적인 사건을 최소화하고 일상적이고 소소한 행위 속에서 의미를 끌어내는 방식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요리'라는 지극히 평범한 행위가 폭력적 정복 서사 전체를 대체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다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중반부의 반복되는 패턴 — 밤마다 소에게 가서 우유를 짜고, 아침에 팔고, 돈을 모으는 루틴 — 은 메타포로서는 완벽하지만 서사적 긴장감을 다소 이완시키는 면이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 구간에서 몰입이 살짝 끊기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단조로움 자체가 두 사람의 소박한 일상을 체감하게 하는 장치라고 받아들이면, 불만보다는 이해가 앞섭니다. 감독이 의도한 리듬이라는 확신이 드니까요.
해골로 완성되는 우정의 의미
영화의 결말은 묵직합니다. 두 사람은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함께 잠이 들고, 그 자리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습니다. 현대의 강변에서 나란히 발견되었던 바로 그 해골이 이들의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처음에 스쳐 지나갔던 도입부 장면의 무게가 한꺼번에 쏟아집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먹먹함을 느낀 건 단순히 비극적 결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자리에서조차 두 사람이 서로의 옆에 있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우정의 완성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 구절을 인용합니다. "인간에게는 우정이 있다(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 man friendship)." 블레이크의 시에서 새에게 둥지가, 거미에게 거미줄이 집이듯, 인간에게는 우정이 집이라는 의미입니다(출처: Poetry Foundation). 쿠키와 킹루는 서로에게 실제로 거처를 내어주었고, 마지막에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서로가 집이 되어주었습니다. 이 구조를 의식하고 보면 영화 전체가 하나의 시처럼 읽힙니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이 영화를 로케이션 촬영(Location Shooting) 방식으로 찍었습니다. 로케이션 촬영이란 세트를 짓지 않고 실제 자연 환경이나 현장에서 직접 촬영하는 방식을 말하는데, 라이카트는 오리건의 실제 숲과 강변에서 촬영함으로써 인물들의 고독과 자연의 물성을 인위적인 장식 없이 날것으로 화면에 담아냈습니다(출처: The Criterion Collection). 덕분에 영화의 공기 자체가 다릅니다. 제 경우엔 중반부 채집 장면에서 이 공기가 가장 강하게 느껴졌는데, 화면 속 흙과 나무의 질감이 실제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했습니다.
라이카트 영화의 핵심 정서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 인간의 고독감과 외로움입니다. 이 영화에서 그 고독은 두 사람이 함께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채워지지만, 결국 세계의 폭력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그러나 라이카트는 그 무력함을 비관적으로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 이후에도 남겨진 두 해골의 자리가 우정이 실재했다는 증거가 되는 역설로 이야기를 닫습니다. 자극적인 연출 없이 이 정도 여운을 남기는 영화가 많지 않다는 게 제 솔직한 감상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퍼스트 카우,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국내 주요 OTT 플랫폼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서비스별 제공 여부는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원하는 플랫폼에서 제목을 직접 검색해 확인하시는 게 가장 정확합니다. 저는 OTT로 처음 봤는데 집에서 조용히 보기에 최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Q. 영화가 지루하지는 않나요? 느리다는 말이 많던데요.
A. 솔직히 말씀드리면, 중반부에 리듬이 느려지는 구간이 분명히 있습니다. 켈리 라이카트 특유의 미니멀리즘 스타일이 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라, 자극적인 전개를 기대하고 보면 답답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두 인물의 관계가 쌓이는 과정에 집중하면 그 리듬 자체가 영화의 언어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처음 20분만 버티면 훨씬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됩니다.
Q. 퍼스트 카우가 왜 네오 웨스턴인가요? 서부극처럼 안 보이던데요.
A. 바로 그게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네오 웨스턴은 서부극의 외형을 갖추되 그 안의 신화와 이념을 뒤집는 장르입니다. 총격전도, 말을 탄 영웅도 없지만, 1820년대 서부 개척 시대의 시공간과 계급 구조, 원주민과 이민자의 관계 같은 서부극의 핵심 요소들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총 대신 요리로 이야기를 푸는 방식 자체가 서부극 문법을 정면으로 비트는 전략입니다.
Q. 4:3 화면 비율이 실제로 보기 불편하지 않나요?
A. 처음 5분 정도는 양쪽 검은 여백이 눈에 거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익숙해지면 오히려 인물들이 훨씬 가깝게 느껴지고, 숲 속 장면에서 나무의 높이와 두 사람의 관계가 한 프레임 안에 자연스럽게 담기는 게 보입니다. 제 경우엔 TV보다 태블릿처럼 작은 화면으로 봤을 때 이 비율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린다고 느꼈습니다.
결론
<퍼스트 카우>는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빌려 미국의 정복 서사를 조용히 해체하고, 그 자리에 호혜와 우정의 이야기를 심어 놓은 작품입니다. 자극적인 장면도, 거대한 메시지를 설교하는 대사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영화가 끝나고 나서 꽤 오래 그 여운이 남았는데, 그건 두 인물의 관계가 진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켈리 라이카트의 다른 작품을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이 영화를 시작점으로 삼아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라이카트의 전작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 과정이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OTT에서 조용히 감성을 채우고 싶은 날 밤, 이 영화가 생각보다 훨씬 좋은 선택이 될 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s4v-98a4vGg&list=PLUpgTv3bu9rHWFdteoNvZs5T5LSrG6j6j&index=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