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영화 <하나 그리고 둘> (양양의 시선, 거리두기, 아시아 영화)

by 몰괜자 2026. 9. 25.

부산국제영화제가 선정한 역대 아시아 영화 100선 7위. 숫자만 봐도 묵직한데, 저는 이 영화를 OTT로 틀기까지 꽤 오래 망설였습니다. 17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발목을 잡았거든요. 그런데 다 보고 나서 느낀 건 딱 하나였습니다. 왜 이걸 이제야 봤나, 싶은 후회.

영화 &lt;하나 그리고 둘&gt;
영화 <하나 그리고 둘>


양양의 시선 — 보지 못하는 것을 찍는 아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장면은 화려한 도시 풍경도, 극적인 사건도 아니었습니다. 막내 양양이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의 뒷모습만 찍어 다니는 장면이었습니다.

양양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볼 수 없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앞만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보지 못하는 자신의 반쪽을 돌려주겠다는 발상입니다. 초등학생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운 말이죠.

이 장면을 두고 프리드리히 니체의 정신적 단계론을 떠올리는 시각도 있습니다. 니체는 인간 정신이 낙타→사자→아이의 순서로 성숙한다고 보았는데, 여기서 '아이'란 무거운 짐과 싸움의 단계를 모두 넘어선 순수한 창조적 존재를 뜻합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양양을 통해 바로 그 '아이'의 시선을 구현했다고 저는 봤습니다. 어른들이 관계와 사업과 감정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동안, 양양만이 세상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닿아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어린 캐릭터에게 이 정도 철학적 밀도를 부여하면서도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는 게, 에드워드 양이라는 감독의 무서운 점이라고 느꼈습니다.

  • 양양은 타인의 뒷모습만 촬영하며 '보이지 않는 진실'을 기록함
  • 니체의 '아이' 단계 — 짐과 싸움을 넘어선 순수한 창조적 존재 — 를 인물로 구현
  • 어른 인물들의 혼란과 대비되며 영화 전체의 철학적 축을 형성
요약: 양양의 카메라는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보지 못하는 삶의 반면을 직시하게 만드는 영화의 핵심 메타포다.

 

서사적 거리두기 — 절제가 만들어내는 몰입

이 영화는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습니다. 외할머니가 쓰러지고, 아버지는 30년 전 첫사랑을 재회하고, 어머니는 깊은 심리적 방황에 빠집니다. 사건의 규모로 보면 얼마든지 드라마틱하게 연출할 수 있는 소재인데, 에드워드 양은 오히려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합니다.

이를 영화 비평 용어로 서사적 거리두기(narrative distancing)라고 합니다. 여기서 서사적 거리두기란, 카메라와 편집이 인물의 감정에 밀착하는 대신 관찰자의 위치를 고수함으로써 관객 스스로 감정을 구성하도록 유도하는 연출 방식입니다. 클로즈업을 최소화하고, 정적인 롱테이크 위주로 장면을 구성하는 에드워드 양의 방식이 딱 여기에 해당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꼈는데, 거실 불을 끄고 앉아 있다 보니 어느 순간 화면 속 가족이 제 가족처럼 느껴졌습니다. 억지로 감동을 밀어 넣지 않으니 오히려 더 깊이 빨려 들어가는 역설이었습니다. 사업 방식을 고민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는 직장에서 방향을 잃었던 제 시간이 겹쳐 보였고, 어머니의 정서적 공허함에서는 가까운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170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게 사실입니다. 영화적 스펙터클 — 즉 시각적 볼거리와 사건의 연속 폭발로 관객을 붙잡는 방식 — 없이도 이 정도 몰입을 만들어낸다는 건, 연출의 밀도가 그만큼 높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약: 에드워드 양의 절제된 연출은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그 빈 자리에 관객 자신의 삶을 채워 넣게 만드는 정교한 전략이다.

 

아시아 영화의 정점 — 이 작품이 남긴 좌표

'하나 그리고 둘'은 2000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칸 감독상(Prix de la mise en scène)이란, 작품 전체의 완성도보다 연출자의 시각적·서사적 독창성을 특별히 인정하는 상으로, 황금종려상과 함께 칸의 핵심 경쟁 부문 수상작에게 주어집니다. 에드워드 양이 이 상을 받은 건 우연이 아닙니다. 그의 연출 방식 자체가 수상의 이유였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집계한 역대 아시아 영화 100선에서 이 작품은 7위에 올라 있습니다(출처: 부산국제영화제).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같은 거장들의 작품과 나란히 이름을 올린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흔히 예술 영화를 '어렵고 지루한 영화'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영화는 그 선입견을 비껴갑니다. 타이베이라는 공간, 밀레니엄을 앞둔 시대적 긴장감, 그리고 어느 집 거실에서나 일어날 법한 가족 간의 감정적 단절. 이 조합이 만들어내는 리얼리티는 지역과 시대를 초월합니다.

작년 칸 영화제 클래식 부문에서 재조명된 이후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된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4K 리마스터링이란, 원본 필름을 최신 디지털 기술로 복원해 해상도와 색감을 현대 영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입니다. 20년이 넘은 작품이지만 현재 극장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는 건, 이 영화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작품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출처: 칸 영화제 공식 사이트).

제목 '하나 그리고 둘'의 원제는 '一一'(Yi Yi)입니다. '하나'는 독립된 개인을, '둘'은 그 개인들이 엮여 만드는 관계를 뜻합니다. 개인과 가족이라는 두 층위를 제목 하나에 압축한 셈인데, 다 보고 나서 제목을 다시 떠올리니 더 선명하게 이해됐습니다.

요약: 칸 감독상 수상과 아시아 영화 100선 7위라는 좌표는 허명이 아니라, 이 영화가 가진 연출적 독창성과 보편적 공감력이 쌓아올린 결과다.

 

자주 묻는 질문

Q. 하나 그리고 둘, 170분 러닝타임이 너무 길지 않나요?

A. 저도 처음엔 같은 이유로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기 시작하면 사건이 없다는 게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에드워드 양의 서사적 거리두기 연출 덕분에 인물들의 일상 속으로 조용히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라, 체감 시간은 훨씬 짧게 느껴집니다. 거실 불을 끄고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환경이라면 170분이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Q. 에드워드 양 감독을 처음 접하는데, 이 영화부터 봐도 괜찮을까요?

A. 충분히 괜찮습니다. '하나 그리고 둘'은 에드워드 양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도 가장 접근성이 높은 편에 속합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처럼 역사적 배경 지식이 없어도, 현대 도시 가족의 이야기라는 보편적 설정 덕분에 서사 자체를 따라가기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예술 영화(art cinema) 특유의 느린 호흡 — 상업 영화와 달리 사건 중심이 아닌 감정과 내면의 흐름을 따라가는 방식 — 에 대한 마음의 준비는 필요합니다.

 

Q. OTT에서 볼 수 있나요, 아니면 극장을 가야 하나요?

A. 제가 본 건 OTT였습니다. 현재 일부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서비스 중입니다. 영상미보다는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는 작품 특성상 집에서 집중해서 보는 것도 충분히 좋은 감상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Q. 칸 영화제 감독상이 황금종려상과 어떻게 다른가요?

A. 황금종려상(Palme d'Or)이 칸의 최고상으로 작품 전체를 평가한다면, 감독상(Prix de la mise en scène)은 연출자의 독창적인 시각과 영화적 언어에 초점을 맞춥니다. 에드워드 양이 감독상을 받았다는 건, 심사위원들이 스토리보다 그의 연출 방식 자체에 주목했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하나 그리고 둘'은 스토리의 자극보다 프레임과 정적인 연출이 훨씬 강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결론

'하나 그리고 둘'을 다 보고 나서 한동안 화면을 끄지 못했습니다. 먹먹하다는 표현 외에 딱 맞는 말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자극적인 사건도, 압도적인 시각효과도 없는데, 남의 가족의 3시간짜리 일상을 들여다보고 나서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웠는지. 제 경험상 이런 여운을 남기는 영화가 흔하지 않습니다.

조용한 주말,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한 가족의 삶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면 이 영화가 좋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보고 나서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과 짧게라도 이야기를 나눠보시길 권합니다. 양양이 카메라로 담으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 질문을 머릿속에 들고 들어가면 영화가 조금 다르게 보일 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0MXCk7BWGJs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