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실사 영화로는 22년 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한 작품이 한국에 상륙했습니다. 이상일 감독의 '국보'입니다. 저도 솔직히 3시간짜리 가부키 영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살짝 망설였는데, 막상 보고 나서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가부키라는 소재, 낯설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부키(歌舞伎)는 17세기 에도 시대에 성립된 일본의 전통 무대 예술입니다. 여기서 가부키란 노래·춤·기예를 결합한 종합 공연 형식을 의미하며,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출처: UNESCO 무형문화유산). 저처럼 가부키를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관객 입장에서는 처음 몇 장면이 꽤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영리한 건, 가부키 공연이 나올 때마다 친절한 서사 자막을 화면에 띄운다는 점입니다. 덕분에 저도 공연의 줄거리를 따라가면서 그게 주인공의 현재 감정과 얼마나 정확하게 겹치는지를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캐릭터의 내면을 대신 발화하는 장치로 쓰인 셈입니다.
가부키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진입을 망설이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그 낯섦 자체가 영화의 몰입을 강화한다고 느꼈습니다. 아는 게 없으니 그 세계의 규칙을 영화가 알려주는 대로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고, 그 규칙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완전히 빠져 있게 됩니다.
온나가타를 둘러싼 두 남자의 진짜 전쟁
영화의 중심에는 온나가타(女形)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온나가타란 가부키에서 여성 역할을 전담하는 남성 배우를 가리킵니다. 가부키 초기에는 여성이 직접 무대에 올랐지만, 에도 막부가 풍기문란을 이유로 여성의 공연을 금지하면서 남성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성별을 넘어서는 연기의 경지 그 자체가 온나가타의 본질입니다.
주인공 키쿠오는 야쿠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가부키 명문가의 당주 한지로에게 발탁되어 일본 최고의 온나가타를 목표로 성장합니다. 그 맞은편에는 가부키 종가의 적통 순스케가 있습니다. 혈통은 있으나 재능이 아쉬운 순스케와, 재능은 넘치지만 혈통이 없는 키쿠오. 이 구도 자체가 이미 극적 긴장감을 내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숨이 막혔던 장면은 "나에게 필요한 건 너의 혈통이다"라는 고백이 터지는 시퀀스였습니다. 그 직후 이어지는 가부키 공연 장면과 맞물리면서, 두 인물의 감정선이 말 한 마디 없이도 전부 읽히는 느낌이었습니다. 연출이 이 정도 수준이면 대사가 사실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두 주연 사이의 관계를 동성애로 오해하는 시각도 있는데, 영화는 그런 방향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이건 라이벌이자 친구로서 예술의 극한을 두고 벌이는 싸움이고, 그 싸움이 훨씬 더 처절합니다.
- 키쿠오: 야쿠자 출신, 천재적 재능, 혈통 결핍
- 숙스케: 가부키 종가 적통, 혈통 보유, 재능의 한계를 체감
- 두 인물의 결핍이 맞부딪히며 극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
이상일 감독이 만들어낸 미장센의 무게
이상일 감독은 재일교포 3세 출신으로, '악인'(2010), '분노'(2016)에 이어 이번에도 요시다 슈이치 작가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했습니다. 이 계보를 알고 나면 국보가 단순한 기획물이 아니라 감독이 오랜 시간 쌓아온 신뢰와 작업 방식의 총합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출처: 부산국제영화제 — 국보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식 상영되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란 카메라 앵글, 조명, 배우의 배치, 무대 세트 등을 포함한 화면 구성 전체를 뜻합니다. 이상일 감독의 미장센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가부키 공연 장면을 인물의 심리 상태와 정밀하게 맞물리게 설계했다는 점입니다. 키쿠오가 무대 위에서 여자를 연기할수록, 카메라는 그를 더 가까이 포착하고 조명은 점점 그를 고립시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식으로 공연 씬이 서사의 핵으로 기능하는 영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174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문제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후반부에 서사의 호흡이 다소 늘어지는 구간이 있다는 점은 솔직히 인정합니다. 인물의 집착과 고뇌를 반복적으로 짚는 방식이 어떤 관객에게는 과잉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호흡이 없었다면 마지막 장면의 폭발력도 반감되었을 것 같습니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숨을 고르게 만든 것이라고 저는 판단했습니다.
배우진이 이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요시자와 료(키쿠오 역)와 요코하마 류세이(숙스케 역)는 각자 젊은 시절부터 중년까지 한 인물을 연기해야 했습니다.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쌓인 욕망·좌절·체념의 결을 몸으로 표현해야 하는 역할입니다. 이 두 배우의 연기 차력쇼는 보는 내내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아역을 맡은 쿠로카와 쇼야는 영화 '괴물'에서 이미 그 역량을 증명한 배우입니다. 어린 키쿠오의 눈빛만으로 이후 서사 전체의 씨앗을 심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아역이 이렇게까지 영화의 분위기를 좌우할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가부키 당주 한지로 역의 와타나베 켄은 언제나처럼 무게감이 있었고, 한지로의 아내 역을 맡은 테라지마 시노부는 실제 가부키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이 화면 속 설득력으로 바로 이어졌습니다. 배경과 역할이 일치하는 배우를 캐스팅한 것 자체가 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한몫했다고 봅니다.
카부키 문화 특유의 이에모토 제도(家元制度)도 영화를 통해 처음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모토 제도란 예술의 기술과 가르침을 특정 가문이 독점적으로 세습하는 일본 전통 예술계의 관습을 뜻합니다. 이 구조 안에서 혈통 없는 키쿠오가 살아남으려면 단순히 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냉혹한 현실이 서사에 일관되게 깔려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가부키를 전혀 모르는데 영화 이해가 가능한가요?
A. 저도 가부키를 거의 몰랐지만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각 공연 씬에 서사 자막이 제공되고, 감독이 가부키 문화의 배경을 극의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설명해 줍니다. 사전 공부 없이 극장 가셔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습니다.
Q. 3시간짜리인데 진짜 안 지루한가요?
A. 지루하지 않다고 단언하는 분들도 많은데, 저는 후반부에 호흡이 살짝 늘어지는 구간이 있다는 점은 솔직히 인정합니다. 다만 그 여백 덕분에 마지막 장면의 폭발력이 더 커집니다. 심리극 계열을 좋아한다면 오히려 그 호흡이 매력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Q. 두 남자 주인공 사이에 동성애 코드가 있나요?
A. 없습니다. 온나가타라는 소재 때문에 그렇게 오해하는 시각도 있는데, 영화는 철저히 라이벌이자 친구로서 예술의 극한을 두고 벌이는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두 인물의 관계는 동성애가 아니라 서로의 결핍을 거울처럼 비추는 구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Q. 이상일 감독의 전작을 봐야 이 영화를 더 잘 즐길 수 있나요?
A. 전작을 보면 감독 특유의 심리 묘사 방식에 더 빨리 적응할 수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국보는 독립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어서, 전작을 모르더라도 완결성 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전작 '악인'이나 '분노'를 본 분이라면 감독의 연출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비교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
개인적으로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을 작품으로 꼽겠습니다. 익숙한 감정인 질투, 우정, 라이벌 의식에 가부키라는 낯선 소재를 얹고, 이상일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전 세대 배우들의 연기가 하나로 묶였을 때 이런 결과물이 나온다는 게 새삼 놀라웠습니다.
다만 가부키와 이에모토 제도처럼 일본 전통 문화 특유의 폐쇄성에 강한 이질감을 느끼는 분이라면 후반부가 다소 버겁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은 미리 말씀드립니다. 그래도 한 인간이 혼신을 다해 예술가의 극한에 도달하는 과정을 영화로 경험하고 싶다면, 영화를 보시길 권합니다. 지금은 아쉽게도 OTT에 올라오지 않아 아직은 접근성이 어렵지만, 팬들의 바람대로 OTT에 곧 올라올 거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