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 영화를 보기 전에 혹시 "예습"부터 하셨습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플래시>는 그 강박을 처음부터 비웃어 버렸습니다. 주말 오후 쿠팡플레이로 별생각 없이 재생했다가, 후반부에 울컥하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사전지식 없이도 충분했고, 감정선은 예상보다 훨씬 깊었습니다.

사전지식 없이 봐도 됩니까 — 멀티버스를 대하는 영리한 태도
솔직히 요즘 히어로 영화들은 보기 전부터 지칩니다. 멀티버스(Multiverse), 즉 하나의 세계가 아닌 수많은 평행 우주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설정은 이제 DC와 마블 양쪽 모두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장치인데, 이걸 제대로 따라가려면 줄줄이 이어진 전작을 꿰고 있어야 한다는 압박이 생깁니다. 여기서 멀티버스란 각기 다른 역사와 인물이 공존하는 평행 우주들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저도 재생 버튼을 누르면서 "또 설명 들어야 하나" 싶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플래시>는 그 기대를 보기 좋게 비껴갔습니다. 멀티버스를 구절구절 해설하는 대신, 마이클 키튼이 연기하는 1989년 배트맨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냥 웃음을 던지며 넘어갑니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라는 혼란 자체를 유머 코드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이 장면에서 별다른 배경지식 없이도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고, 그 다음 장면이 궁금해졌습니다.
사전 지식 측면에서 팀 버튼의 <배트맨>(1989)과 <맨 오브 스틸>을 미리 보면 맥락이 풍부해지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배트맨이 어둠 속에서 범죄자를 쫓는 영웅이고, 슈퍼맨이 하늘을 나는 외계인 영웅이라는 정도만 알아도 이 영화의 서사를 따라가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슈퍼히어로 영화라고 해서 유독 "공부해야 한다"는 잣대를 들이미는 건, 제 경험상 이건 좀 과한 요구입니다.
- 팀 버튼의 <배트맨>(1989): 마이클 키튼 버전 배트맨의 원전. 보면 유머가 배가된다
- <맨 오브 스틸>: 이 시리즈 슈퍼맨의 기원. 몰라도 무방하지만 알면 후반 장면이 더 묵직하다
- DC 기본 상식(배트맨=어둠의 기사, 슈퍼맨=강철의 사나이):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멀티버스가 만든 버디 무비 — 과거 배리와 현재 배리의 티키타카
영화의 핵심 구도는 18세의 과거 배리와 현재의 배리가 짝을 이루는 버디 무비(Buddy Movie) 형식입니다. 버디 무비란 성격이나 처지가 다른 두 인물이 함께 사건을 해결하며 관계를 쌓아가는 장르를 말합니다. 이 영화는 그 두 인물이 동일인물이라는 발상을 선택했는데, 제가 직접 봐보니 그 조합이 생각보다 훨씬 잘 굴러갔습니다.
능력은 있지만 경험이 없는 과거의 배리, 그리고 경험은 있지만 아직 능력이 완성되지 않은 현재의 배리가 서로를 보완하며 부딪히는 장면들은 자연스럽게 웃음을 만들어냈습니다. 초능력적 설정만 보면 마블의 퀵실버와 유사하지만, 서사 구조는 스파이더맨 시리즈처럼 트라우마와 성장을 정면으로 다루는 쪽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트라우마(Trauma)란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행동과 선택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상태를 뜻합니다.
제가 특히 크게 웃었던 장면은 <백 투 더 퓨처> 관련 농담이었습니다. 실제로 <백 투 더 퓨처> 제작 당시 에릭 스톨츠가 먼저 캐스팅되었다가 촬영 도중 마이클 J. 폭스로 교체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영화는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플롯 안으로 직접 끌어들입니다(출처: IMDb, Back to the Future 트리비아). 산업적 현실, 즉 배우 교체나 제작 파행 같은 현실을 이야기 안으로 흡수해버리는 이 위트는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순한 팬 서비스 이상의 영화적 유희였습니다.
스피드포스(Speed Force) 공간의 그래픽 처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스피드포스란 플래시가 초고속으로 이동할 때 진입하는 에너지 차원으로, 시간과 공간이 뒤틀린 시각적 공간으로 표현됩니다. 기존 DC 시리즈의 묵직하고 둔중한 액션과 달리, 이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움직임은 가볍고 날렵했습니다. 거실 TV 화면으로 봤는데도 시원시원하게 전달될 만큼 속도감이 살아 있었습니다.
공장형 블록버스터 안에서 건진 감정선 — 어머니, 트라우마, 운명론
솔직히 히어로 영화에서 울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후반부 어머니와 관련된 장면에서 예상치 못하게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이 영화의 핵심 주제는 결국 "과거는 바꿀 수 없다"는 운명론적 수용입니다. 운명론(Fatalism)이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사건은 이미 정해진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세계관을 가리킵니다.
배리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타임라인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실패합니다. 그 과정에서 영화가 전달하는 건 히어로의 무적함이 아니라, 어떤 상실은 결국 받아들여야 한다는 쪽입니다. 배트맨과 플래시가 공유하는 부모 상실의 트라우마는 이 영화를 단순한 액션 블록버스터와 다른 결로 이끌었습니다.
물론 한계도 분명합니다. 후반부 클라이맥스의 CG, 즉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한 시각효과는 완성도 면에서 짙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제 경험상 이 부분은 극장이 아닌 OTT 환경에서 봐도 티가 날 정도였습니다. DC 엔터테인먼트가 제작비와 후반 작업 일정 사이에서 타협한 흔적이 보였다는 평가가 공개 당시 이미 나왔고(출처: Variety, The Flash Review), 직접 봐보니 그 지적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어머니 장면의 감정적 무게는 그 한계를 덮고도 남았습니다. 규격화된 블록버스터 안에서 인물의 내면 성장을 진정성 있게 짚어낸 장면이었고, 오랜만에 히어로물에서 뭉클함을 챙긴 순간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플래시 영화 보기 전에 DC 영화 다 봐야 하나요?
A. 제가 직접 봐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배트맨과 슈퍼맨이 어떤 영웅인지 기본 개념만 알면 서사를 따라가는 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굳이 고르자면 팀 버튼의 <배트맨>(1989)을 미리 보면 마이클 키튼 등장 장면에서 웃음이 배가되는 정도입니다.
Q. 플래시 영화에서 멀티버스 설명이 복잡한가요?
A.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멀티버스 개념 자체를 유머로 소화하며 관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방식입니다. 제 경험상 설정에 막혀 몰입이 깨지는 순간은 없었습니다.
Q. 플래시 영화 OTT로 봐도 괜찮은가요, 극장급인가요?
A. 스피드포스 장면의 속도감은 거실 TV로도 충분히 살아 있었습니다. 단, 후반부 CG 품질은 극장에서도 아쉽다는 평이 있을 만큼 완성도가 고르지 않아서, OTT 환경이 오히려 그 단점을 덜 도드라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Q. 백 투 더 퓨처 모르면 플래시 유머 이해 못 하나요?
A. 몰라도 장면 자체가 웃깁니다. 다만 에릭 스톨츠 캐스팅 교체 사건을 알고 있으면 그 농담이 훨씬 깊게 와닿는 건 사실입니다. 영화적 유희를 두 겹으로 즐길 수 있는 구조입니다.
결론
<플래시>는 최근 슈퍼히어로 장르가 빠진 설정 과잉의 함정을 영리하게 비껴간 작품입니다. 멀티버스를 구절구절 설명하는 대신 웃음으로 흘려보내고, 산업적 현실마저 서사 장치로 흡수하는 위트는 이 영화만의 뚜렷한 강점이었습니다. 후반부 CG 완성도는 분명한 한계였지만, 어머니 장면에서 건져낸 감정적 무게가 그 아쉬움을 덮었습니다.
OTT로 가볍게 시작해서 뜻밖의 감동까지 챙길 수 있는 영화를 찾고 계신다면, 쿠팡플레이에서 재생 버튼을 눌러보시기 바랍니다. 사전 공부 없이, 편안하게 누워서 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nQ_yPAhOjMI&list=PLUpgTv3bu9rHWFdteoNvZs5T5LSrG6j6j&index=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