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발자국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멀고도 가까운》의 주인공 주노가 재개발 구역의 낡은 바(Bar)를 지키는 이유는 딱 하나, 죽은 연인이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미련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설정 하나만으로 이미 영화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 먹먹함이 결코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거든요.고립 — 멈춰버린 공간이 말하는 것이 영화를 보면서 제가 가장 먼저 주목한 건 배우의 연기나 대사가 아니었습니다. 재개발 구역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겨진 주노의 바, 그 공간 자체였습니다.영화는 이 한정된 공간을 단순한 배경으로 쓰지 않습니다. 심리적 밀폐 공간(Enclosed Space)으로 활용하는데, 쉽게 말해 주인공의 억압된 내면을 물리적 장소로 가시..
독립영화 전용관 시네큐브가 올해로 개관 25주년을 맞았습니다. 이를 기념해 이종필, 윤가은, 장건재 감독이 각각 30분 남짓한 단편을 엮은 옴니버스 영화 '극장의 시간들'이 탄생했는데, 제가 이 작품을 찾게 된 건 순전히 OTT로 영화를 보다가 문득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극장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는 걸,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실감했습니다.시네큐브 25주년, 세 감독이 붙든 극장의 의미옴니버스(omnibus) 형식이란, 여러 감독이 하나의 주제 아래 각자의 단편을 연출해 한 편으로 묶는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앤솔로지처럼 서로 다른 목소리가 같은 그릇에 담기는 구조인데, '극장의 시간들'은 이 형식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이종필 감독은 침..
영화를 다 봤는데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잠을 잘 수 있다면, 그건 제대로 본 게 아닐지 모릅니다. 샬롯 웰스 감독의 을 OTT로 다시 꺼내 본 날 밤, 저는 그냥 잠들지 못했습니다. 처음 극장에서 봤을 때 흘려보낸 디테일들이 두 번째 시청에서 전부 되살아나면서, 가슴 한가운데가 서늘하게 내려앉았습니다.따뜻한 휴가 영화라고 생각했다면, 그게 함정입니다포스터만 보면 아버지와 딸이 튀르키예 햇살 아래 함께 웃는, 소담한 성장 영화처럼 느껴집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봤습니다. 그래서 극장에서 첫 관람 당시에는 뭔가 놓친 것 같은 묘한 찜찜함만 남긴 채 나왔습니다.그런데 두 번째로 다시 봤을 때는 달랐습니다. 영화의 실제 구조는 어른이 된 소피가 아버지와의 여행에서 남겨진 캠코더 영상을 되짚으며, 과거에 전..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통일 대한민국이 디스토피아의 배경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독립영화 《지느러미》는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더 스퀘어》와 《슬픔의 삼각형》을 제작한 필립 보베르가 참여한 작품입니다. 예고편의 기괴한 분위기에 이끌려 적은 상영관을 직접 찾아갔는데, 예상보다 훨씬 묵직한 것이 남았습니다.통일 대한민국이라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영화가 설계한 세계는 꽤 구체적입니다. 배경은 통일된 대한민국이지만, 자유로운 민주국가의 느낌은 전혀 없습니다. 북한 체제의 분위기가 짙게 깔린 채로, 애국 이데올로기(ideology)가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사회입니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란 특정 집단이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내면화시키려는 가치 체계를 말하는데, 영화 속에서는 얼굴에 검..